매일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봉철 씨는 화물차에 가득 실은 활어를 거래처에 납품하는 일을 합니다. 싱싱한 활어를 거래처에 전달하기만 하면 봉철 씨의 임무는 끝.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수족관을 꼼꼼히 살피고 보수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수리를 해주기도 합니다. 그는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노력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오늘도 봉철 씨는 웃는 얼굴로 수산시장으로 향합니다.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겪던 젊은 시절
순창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봉철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사촌 형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에서 열심히 일도 하고 돈도 모을 생각이었습니다. 사촌 형님이 운영하는 공업사에 들어가 무엇이든 열심히 했습니다. 3년 동안 밤낮으로 일했지만, 조그마한 공업사는 IMF라는 큰 장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직장을 옮겨 2년 정도 더 일했지만 봉철 씨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민 많던 봉철 씨에게 손을 내밀어 준 건 전주에 사는 형님들이었습니다.
“당시에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이 전주에 살고 있었거든요. 사업을 하는 형님 밑에서 다시 5년 정도 설비 일을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봉철 씨는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서울에서 알게 된 지인이 인천에 새로운 일자리가 있다며 봉철 씨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렇게 봉철 씨는 인천에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지금은 인천 지역에 활어를 운반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사랑, 현해탄을 건너다
봉철 씨가 일본인 아내 야따나미와 씨를 처음 만난 건 1999년. 그가 전주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던 둘은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살던 미와 씨가 한국으로 여행을 왔을 때 봉철 씨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의사소통도 못하던 둘이었지만,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한국 여행 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한국에서 봤던 남편이 자꾸 생각이 나는 거예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편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더라고요.”
야따나미와 씨는 이야기를 하며 수줍게 웃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편지.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화를 하기엔 비용도 만만치 않아 두 사람은 편지로 마음을 전했습니다. 뜨거운 열애 덕분에 지금은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해도 전혀 불편함이 없는 미와 씨. 봉철 씨의 둘째 형수님도 일본인이어서 처음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 받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3년 동안 장거리 연애를 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고, 2002년 미와 씨는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딸 셋에 아들 하나, 다둥이 아빠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로 큰 딸 시은이, 둘째 아들 금찬이, 셋째 딸과 넷째 딸인 금희와 나은이까지. 무려 여섯 식구가 생겼습니다. 시은이의 나이는 이제 열 두 살, 든든한 아들 금찬이는 열 살, 금희는 일곱 살에 막내 나은이는 올해 5월에 태어나 이제 겨우 한 살입니다. 모두 부모의 보살핌을 필요로 할 나이지만 봉철 씨와 아내는 그렇게 해주지 못해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신장이 좋지 못했던 나은이는 추가 검진이 필요한 상황. 태어날 당시에도 병원 비용이 부담되어 산후조리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아내를 생각하면 봉철 씨의 마음은 더욱 아파옵니다. 그래도 봉철 씨와 아내 미와 씨는 아이들 덕분에 힘이 납니다.
“제가 나은이를 가졌을 때 몸이 안 좋아서 한 달 동안 집에 누워만 있었던 적이 있어요. 아예 밖에 나갈 수가 없었는데 시은이와 금찬이가 언니, 오빠 노릇을 톡톡히 해내더라고요. 학교 가기 전에 금희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는 일을 직접 했어요. 아침 먹이고 등원 준비하는 것까지 모두 다요.”
조용하고 꼼꼼한 성격의 시은이는 만들기도 잘하고, 동생 챙기기도 잘 합니다. 셋째 금희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언니가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라고 말 할 정도입니다.
공구 상자를 들고 다니는 남자
봉철 씨는 일주일 내내 일을 합니다. 매일 새벽 연안부두에서 싱싱한 활어를 받아 거래처에 납품을 하는데, 주 거래처인 횟집이 연중무휴로 영업을 하기 때문에 덩달아 봉철 씨도 주말과 휴일에 상관없이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좀 더 여유가 있다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쯤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거래처 관리도 중요하고, 대체 인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음처럼 쉽게 쉴 수가 없습니다. 1년 365일을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여러 횟집을 돌며 패류, 새우, 전어, 오징어, 횟감 등 다양한 품목을 운반합니다.
“활어를 납품하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단순한 일이에요. 새벽에 수산물이 연안부두로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기다렸다가 차에 넣고 거래처에 납품만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해요.”
봉철 씨는 같은 품목이라도 날마다 상태와 크기에 따라서 가격이 달라지는데 활어를 보는 눈썰미가 가장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판매업자와 가격 흥정을 잘하는 것도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또 횟감은 사이즈 별로 구매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활어의 상태를 파악해서 정확하게 판단해야 무사히 거래처에 납품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미 10년 째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봉철 씨야 말로 이 분야의 전문가. 그도 처음엔 어떤 활어가 좋은지 도매업자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지 막막했지만, 하루하루 경험이 쌓여 지금은 ‘이봉철’이라는 이름 만으로 믿고 거래하는 사장님이 많다고 합니다. 봉철 씨가 거래처 사장님들의 신뢰를 얻게 된 비결이 하나 더 있습니다. 비밀은 바로 봉철 씨가 몰고 다니는 차 안에 있는 공구상자에 숨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대부분 거래처에 납품하는 것까지만 담당을 하시고요. 사실 원래 임무는 거기서 끝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제가 운반한 활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제 신념이에요.”
봉철 씨의 차에서 거래처의 수족관으로 옮겨진 어류가 손님상에 오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선도 유지입니다. 그래서 수족관 안은 항상 깨끗하고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며, 여름과 겨울에 적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것이 관건. 활어 운반업을 하기 전, 다년 간 공업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봉철 씨에겐 이런 장비의 상태를 파악하고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수족관의 기계들이 하루 종일 작동을 하다 보면 냉각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모터가 고장 날 수도 있어요. 전기 배선 등 구조를 알아야 고칠 수 있어서 아무나 수리를 했다가는 위험할 수 있죠. 다행이 전 관련 업종 종사 경험이 있어서 거래처 사장님들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잘 돌아가지 않던 모터도, 냉각기와 히터도 봉철 씨의 손만 거치면 어느새 새것처럼 다시 새 생명을 찾습니다.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는 봉철 씨는 횟집 사장님 사이에서 소문이 났고, 덕분에 10여 년 이상 활어 납품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한때는 활어 운반하는 일 대신 인천에 작은 횟집을 운영한 적도 있었지만 가게 운영이 쉽지 않아 1년 만에 접어야만 했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사업 실패로 인해 부채까지 떠 안게 된 봉철 씨네 가족. 부채 해결을 위해 가지고 있던 1톤 활어차를 처분하고 활어 유통회사에 취직을 해 다시 활어 운반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프트카를 받게 된다면 좀 더 안정적으로 활어 운반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0여 년 동안 쌓아온 인맥으로 좋은 품질의 활어를 경쟁력 있는 가격에 구입할 수 있거든요. 그 동안은 유통 회사에 소속되어 일을 해왔지만, 차를 받으면 사업자를 내고 제 이름 석자를 건 유통업을 할 수 있어요.”
봉철 씨의 바람은 안정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여유가 생기면 온 가족이 일본에 여행을 가는 것입니다. 결혼 후 한 번도 일본에 가지 못한 아내를 위해 꼭 일본에 가고 싶다는 이봉철 씨. 이제는 새벽부터 밤까지 봉철 씨와 든든하게 함께 달리는 기프트카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