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남 2녀 다복한 박정현 씨네 가족의 작은 집은 아이들로 늘 북적북적합니다. 아동보호소에서 자라 외롭게 살아온 정현 씨에게 ‘가족’이란 지금 곁에 있는 아내와 사랑스러운 아이들입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 그리고 몇 번의 중식당 사업 실패와 최근의 교통사고까지 연이은 악재 속에서도 정현 씨가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스스로 이뤄낸 가족을 위해 그는 지금 새로운 희망을 꿈꾸려 합니다. 정성이 듬뿍 담긴 중화요리를 만들어 다시 한 번 일어서기 위해 도전하는 박정현 씨의 이야기입니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
박정현 씨의 기억은 7살부터 시작됩니다. 이전엔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기억이 흐릿할 뿐입니다. 정현 씨의 이름도 대전에 있던 아동보호소에서 지어준 것입니다. 따뜻하게 잘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끼니 때마다 식사가 나오는 보호소는 어린 정현 씨에게 소중한 보금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은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싶었습니다. 어떤 날은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놀고 싶기도 했습니다. 보호소에선 끼니 때마다 일정량의 음식만 제공 되었고, 아이들 관리를 위해 통금시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현 씨는 날이 갈수록 보호소 생활이 답답해졌다고 합니다.
"여기를 나가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놀고 싶을 때 놀고, 맛있는 것도 마음껏 먹고요. 그래서 중학교 입학하던 날 결국 보호소를 나오고 말았어요."
작은 중국집 보조에서 주방장이 되기까지
14살 소년은 목적지도 없이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3일 동안 앞만 보며 걸었습니다. 배고팠던 그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작은 중식당. 무작정 들어가 먹여주고 재워달라 애원했습니다. 어린 소년의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중식당 사장님 부부는 정현 씨를 받아주었고, 정현 씨의 요리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장님 밑에서 3년 동안 주방 보조와 배달 일을 동시에 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숙식을 해결해주셨던 사장님 부부에게 많은 월급을 바랄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월급이 2천4백 원이었어요. 생활하기는 턱없이 부족했죠. 그런데 누군가 서울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정현 씨는 17살이 되던 해에 사장님 부부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친구와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계획도 없이 도망치듯 상경한 정현 씨와 친구는 제조 공장에서 한 달 넘게 일했지만 제대로 된 보수도 받지 못한 채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에게 돌아갈 곳이라곤 어릴 때 받아주었던 대전의 중식당뿐이었습니다. 말도 없이 떠난 것에 크게 혼쭐났지만 결국 사장님 부부는 정현 씨를 품어주었고, 정식으로 요리를 배워보라며 서울에 유명한 중국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소개까지 해주셨습니다. 제대로 중화요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두고 정현 씨가 망설일 이유는 없었지요. 서울 혜화동의 한 중국집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해 면을 만지고 재료를 다듬고 그릇에 올리고 요리를 하기까지 꼬박 4년 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요리를 배웠습니다. 잠자는 것 외에는 주방에만 붙어있다 보니 어느새 돈도 차츰차츰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이 있고 돈도 벌게 되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현 씨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실패의 연속
하지만 그 희망은 금세 현실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4년이 지난 어느 날 함께 일을 하면서 정현 씨를 아껴주었던 총 주방장님이 야심 차게 시작한 새로운 중국집에 스카우트되면서부터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문을 연지 3개월 만에 식당이 폐업을 한 것입니다. 백방으로 취업을 해보려 노력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결국 다시 사장님 부부에게 찾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력이라고 해봐야 초등학교 졸업인 저에게 사장님께서 검정고시를 권해주셨어요. 지금 아니면 못할 거라고 하시면서요."
중국집에서 일하며 차곡차곡 통장에 모아 두었던 돈을 가지고 9개월 만에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때가 겨우 21살 남짓, 이제는 정말 새롭게 출발하려는 희망을 품은 그에게 여전히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접한 불상 조각 기술을 월급도 제대로 못 받으며 자그마치 7년이라는 세월 동안 배웠지만 명장 자격증을 따지 못하면서 포기하게 되었고, 전 재산을 털어 문을 연 중국집은 여러 가지 문제로 1년을 채우지 못한 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절망뿐, 1년 가까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세상에 대한 한탄을 하며 방황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시절 그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 건 지금의 아내였습니다. 중국집을 운영하던 때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생이었던 아내는 왼쪽 눈은 실명한 상태였지만, 정현 씨와 미주 씨는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점점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정현 씨가 방황하던 시기에도 간간이 연락하며 의지하는 사이로 지내다가 다시 열심히 살아보자 결심하며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정현 씨 곁에 지금의 아내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나의 가족을 위하여
정현 씨는 마음을 다잡고 가장 잘 하는, 그리고 좋아하는 일인 중화요리로 다시 일어서기로 했습니다. 당시 대전에 새롭게 개업한 수타 전문 중국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한 덕분에 사장님의 신뢰를 받아 5개의 직영점을 관리할 만큼 자리를 잡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가게 내부 사정으로 인해 2년 만에 모든 직영점이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미 정현 씨와 미주 씨 사이에는 성준이와 민준이가 있었고, 당장 생계를 꾸리기가 어렵다 보니 처가 신세를 지며 중식당 배달 일부터 퀵서비스 일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했습니다. 그에게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형편에 아이들을 많이 낳은 건 어쩌면 제 욕심일지 몰라요. 하지만 항상 외롭게 자라온 제게 아내와 아이들은 너무나도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 사이에 처남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한번 중식당을 개업하며 희망을 품었지만 이마저도 몇 달 지나지 않아 여러 일이 겹치면서 접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설화, 설희 두 딸과 막내아들 정준이까지 생겼습니다. 눈이 잘 안 보여 아이를 혼자 보기 힘든 아내를 위해 시간을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광고를 통해 기프트카를 접하게 되었고,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섯 아이들을 위해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어요. 제게 '가족'이라는 의미를 알려준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해보려고요. 어려운 환경이지만 공부도 열심히 하고 구김살 없이 잘 커주는 아이들, 잘 안 보이는 눈으로 아이들을 키우느라 늘 고생인 아내를 위해 차려내는 음식처럼 정성을 담은 요리로 고객들을 맞이하려고 합니다."
수많은 시련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정현 씨에게 이제는 함께 힘든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가족이 있습니다. 돈을 벌게 되면 아내 눈 먼저 치료해주고 싶다는 정현 씨.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정현 씨의 새로운 희망을 함께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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