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남동구. 알록달록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고 막 돋아난 파릇파릇한 초록빛의 예쁜 식물들이 가득한 이곳은 호송애 씨가 화훼 일을 배우고 있는 꽃집입니다. 보험업, 화장품 판매업처럼 돈을 벌기 위해 해오던 것들과는 다르게 화훼업은 남다른 애정이 느껴진다고 하는데요. 앉으나 서나 꽃집 생각뿐인 호송애 씨에게 꽃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요?
홀몸으로 딸 넷을 키우신 호송애 씨의 어머니는 날마다 쌀과 땔감으로 걱정과 시름이 깊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머니께 늘 도움이 되고 싶었던 호송애 씨는 1995년, 북한의 한 기능공학교에서 기계과를 졸업하고 북한에서도 좋은 직업군에 속했던 상하수도 관련 회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취업으로 어머니의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보았지만 그리 쉽게 나아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가난은 목숨을 위협받을 만큼 심각한 것이었고 결국 그녀는 가족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에 어머니와 언니, 동생을 남겨두고 한국을 향해 먼저 발을 내딛습니다.
고향을 떠나 중국에 도착했을 당시, 누군가의 신고로 인해 다시 북한으로 압송될 뻔했던 호송애 씨. 한국인 목사님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녀는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중국의 한 시골 마을에 숨어 살며 콩·옥수수밭에서 일을 했습니다. 여름과 가을엔 새벽 5시부터 밭에 나가 해질녘까지 종일 밭일을 했고, 밭일이 없는 겨울엔 떡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하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 시절, 호송애 씨 앞에 운명 같은 사람이 나타납니다. 중국에서도 부유한 층에 속했던 그는 그녀의 고단했던 중국 노동자로서의 삶을 끝낼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일찍이 부인을 잃고 혼자 딸아이를 키워오던 그와 혼인신고는 할 수 없었지만, 처음으로 자신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생긴 것에 호송애 씨는 마냥 기뻤다고 합니다. 그 후 그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는 호송애 씨가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한국땅을 밟게 해주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던 호송애 씨의 고단한 삶에 축복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죠. 지금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분을 생각하면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라고 합니다.
당시 나이 스물일곱,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게 된 그녀는 20대 미혼모로 분류되어 다른 북한이탈주민들에 비해 아주 적은 액수의 정착 지원금을 받게 됩니다. 산후조리도 하지 못한 채 1개월 된 아이를 안고 영구임대주택에 들어갔습니다. 서늘한 기운이 맴도는 작은집에 웅크리고 앉아 온몸을 오들오들 떨어야 했습니다. 몸조리해 줄 사람도 없이 한 달이 넘게 아이만 바라보며 지내야 했던 그녀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습니다.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가족이 필요했고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때 그녀는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가족들 모두 무사히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고 드디어 호송애 씨도 딸 미연이와 함께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매월 40만 원씩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받았지만, 아이를 키우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호송애 씨는 미연이를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일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에서 지원하는 무료교육을 통해 운전면허와 한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고 직업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평소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심통이 난 10살, 미연이.
온종일 일을 하고 집에 오면 10시를 훌쩍 넘기기 때문에 호송애 씨도 속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 ‘미연이’를 생각하면 하루도 쉴 수가 없습니다.
최근 호송애 씨는 가족들 몰래 정신과 상담을 받았습니다. 가슴에 종양을 발견하고 약물치료를 받았는데, 혼자서 병을 견디기엔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나 봅니다. 아니, 어쩌면 세상 물정 몰랐던 어린 나이에 북한을 탈출하며 겪었던 고초와 중국에서의 가난하고 혹독했던 생활, 딸 미연이를 낳고 혼자 키우며 남몰래 눈물 흘리던 시절의 아픔과 고독이 지금에 와서 터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호송애 씨는 이 모든 상황을 딛고 미연이 앞에서 당당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편견의 벽을 깨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역사회에서 북한이탈주민들을 도우려는 활발한 손길들이 느껴집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의 기프트카는 많은 사람에게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많은 기관에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었습니다.”
호송애 씨의 꿈은 미연이가 성인이 되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딸 미연이를 꽉 잡아줄 수 있는 테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며 작은 소망을 비춰봅니다.
지난날이 힘들긴 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꽤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을 응원하고 박수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또다른 인생의 꽃을 피우려고 합니다. 기프트카 시즌4의 첫 번째 주인공이 되어 그토록 바랬던 창업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프트카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꽃피우게 된 호송애 씨에게 많은 격려와 힘찬 응원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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