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호 씨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많은 집과 땅을 소유했던 재력가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웠던 덕분에 유영호 씨의 어린 시절 기억도 풍요로웠습니다. 또래 아이들이 갖지 못한 장난감도 많이 가지고 놀았고, 산으로 들로 부모님과 함께 여행도 많이 다녔습니다.
하지만 유영호 씨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가세는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사람을 좋아하고 잘 믿던 아버지께서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빚의 규모는 제법 컸습니다. 아버지는 사기를 당하며 진 빚을 갚기 위해 갖고 있던 땅을 하나둘씩 팔기 시작했고, 재산은 결국 지금 유영호 씨가 살고 있는 집 한 채만 남고 모두 사라졌습니다. 엄청난 위기가 찾아왔지만, 아직 어렸던 유영호 씨는 가족에게 닥친 불행의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아버지는 결국 화병까지 얻으셨습니다. 한번 기울기 시작한 집안 살림은 갈수록 어려워졌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영호 씨는 친구들이 각자의 꿈을 찾아 날개를 펼치는 동안 일자리를 찾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바람과 달리 쉽게 한곳에 둥지를 틀지 못하고 근무 조건이 맞지 않아 이곳저곳 옮겨 다니던 유영호 씨는 어느 날 중견 의류 업체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자신이 찾던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생각에 그제야 마음을 놓은 유영호 씨는 성실하게 일하며 착실히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에 대한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유영호 씨는 구조조정으로 인해 5년간 일하던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평생직장이란 정말 드물다는 것을 깨달은 유영호 씨는 그 어떤 일도 안정적이지 않다면 차라리 과감하게 도전해보자 싶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직장을 잃고 방황하던 유영호 씨는 때마침 사이판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솔깃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이판에 우리나라 차량이 많이 공급되어 있어 한국 자동차를 수리할 수 있는 카센터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영호 씨는 카센터 사업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사이판으로 달려갔습니다. 당시의 유영호 씨는 그 어느 때보다 패기 있었고 의욕이 넘쳤습니다.
영호씨 마음속에 움트고 있던 도전하고 싶은 욕망은 사이판 사업을 만나며 불꽃처럼 일어났습니다. 유영호 씨는 사이판 현지 카센터들을 대상으로 수익 구조와 실제 매출에 대해 꼼꼼히 조사했고 사업 가능성을 점쳐보았습니다. 결국,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유영호 씨는 카센터 일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친구와 동업하기로 했습니다.
유영호 씨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닥치는 대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할 땅을 알아보고 건물을 올릴 벽돌을 쌓고 페인트를 칠하면서 착실하게 사업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어느 곳 하나 유영호 씨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열정을 쏟아 카센터 건물을 지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야심 차게 시작한 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무렵,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유영호 씨가 사이판에서 보냈던 3년은 사람도 돈도 잃게 했고, 씁쓸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고, 아물지도 않는 상처였지만 언제까지 과거 때문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유영호 씨는 구직 활동을 재개해 디지털 광고 회사에 취직했고, 영업과 행사 진행 관리 일을 하면서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회사는 월드컵 특수로 점차 성장해 갔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5년 후 회사가 내부 사정으로 문을 닫자 유영호 씨는 다시 갈 곳을 잃고 방황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무렵, 유영호 씨는 친구를 통해 중국인 아내를 소개받았습니다. 마음에 안정을 찾고 싶고,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유영호 씨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살고 있던 중국 흑룡강성으로 날아갔습니다.
중국에서 처음 만난 아내 양아영 씨의 첫인상은 참 단아하고 예뻤습니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수수한 모습은 단번에 유영호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유영호 씨와 양아영 씨는 서로 호감이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처음 데이트한 날, 유영호 씨와 양아영 씨는 공원으로 소풍을 갔습니다. 공원 호수에 있는 작은 배를 탄 유영호 씨는 양아영 씨에게 한국 노래를 불러주었고, 양아영 씨는 중국 노래를 불러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유영호 씨와 중국에 남았던 양아영 씨는 화상 통화를 하며 사랑을 키워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유영호 씨가 중국을 방문해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단 두 번의 만남으로 길고 긴 부부의 인연을 맺은 유영호 씨와 양아영 씨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유영호 씨는 아내와의 결혼으로 불안하기만 했던 삶에 안정을 찾았고, 두 아이를 낳으며 더없이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현명한 아내와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유영호 씨는 어떻게든 가족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벌이가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마다치 않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므로 더욱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이후에도 그런 꿈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유영호 씨는 마을버스 기사로 1년 정도 운전을 하다가 식당의 매니저로 스카우트되었지만, 그마저도 식당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 시작한 보험 설계사 일도 생각처럼 잘되지 않아 수입은 네 식구가 간신히 생활할 정도였습니다. 무엇인가 돌파구가 절실한 시점이었습니다.
유영호 씨는 식당에서 매니저로 일할 때 식자재 구매를 관리하면서 수산물 납품을 제안받았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산지에서 직송한 수산물을 식당으로 납품하는 일이었는데, 거래처와 차량만 있으면 고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매니저로 일하면서 이미 많은 거래처와 인맥을 쌓았기 때문에 차량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생활비도 빠듯한 형편에 차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방법을 찾을 수 없어 고민만 하고 있던 유영호 씨는 어느 날, 영등포종합사회복지관을 통해 기프트카를 알게 되었습니다. 유영호 씨는 그제야 자신에게 기회가 오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더 이상의 실패는 없다는 각오로 온 마음과 노력을 다해 기프트카에 도전했던 유영호 씨는 결국 기프트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유영호 씨는 사랑하는 가족과 소박하고 단란하게 살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에 한발 더 가까워졌습니다. 유영호 씨의 바람은 부자가 되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었지만, 유영호 씨가 꿈꾸던 안정적인 삶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고 꿈을 펼칠 기회도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영호 씨는 좌절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든든한 기프트카와 함께 다시 또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거친 파도를 잘 헤쳐온 유영호 씨에게 폭풍 후 잔잔해진 바다처럼 맑고 평온한 날이 찾아오길, 기프트카가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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