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옥 씨의 고향은 중국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자강도 부근이었습니다. 한 공장에서 고위직으로 일하는 아버지 덕분에 최은옥 씨의 어린 시절은 북한의 다른 가정들에 비해 나은 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형제들이 커가면서 집안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재빠르고 강단이 있던 최은옥 씨는 오빠와 막내 남동생을 따라 돈이 될만한 것들을 가져다 팔며 어려운 생활을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최은옥 씨는 집안의 생활고를 덜기 위해 목장갑을 짜는 봉제공장에 취업했습니다. 처음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지만, 5년 동안 열심히 일하며 아버지가 받던 월급만큼 받을 수 있게 되어 집안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그 무렵 최은옥 씨는 고향에서 150리 정도 더 들어가야 하는 산골 마을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가면서 최은옥 씨는 설렘보다 걱정이 더 앞섰다고 합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어려울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의 월급에만 기대어 어렵게 생활해가던 최은옥 씨지만 결혼 1년 만에 예쁜 딸, 경희를 낳았고, 세 식구는 오순도순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결혼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남편은 돌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 없이 타향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가 힘들었던 최은옥 씨는 어린 딸을 안고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다시금 돈을 벌러 다니던 최은옥 씨는 어린 딸 경희를 두고 목숨이 위태로운 생활을 계속 하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딸과 함께 먼저 한국으로 간 남동생을 따라가기로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남동생의 도움으로 캄보디아 대사관까지 가게 된 최은옥 씨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이 어렵게만 다가왔습니다. 캄보디아로 이동하던 중 누군가가 준 옷을 입고 다니게 되었는데 그 옷이 캄보디아의 속바지였다고 합니다. 속바지인 줄 모르고 입고 밖을 돌아다니는 그녀를 사람들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며 조롱했습니다. 이후 다른 사람보다 배나 많은 청소를 하며 무시를 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은옥 씨는 남들의 시선이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삶의 기준을 잡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딸과 함께 한국으로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돈을 모았던 최은옥 씨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최은옥 씨는 하나원에서 생활하며 운전면허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2, 3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한 그녀는 높은 점수를 받으며 2등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다른 북한이탈주민들은 모두 놀라며 축하인사를 해주었고 그녀 또한 어깨가 으쓱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교육과정을 마친 최은옥 씨는 거주지를 마련한 후 1주일 동안 동생 내외와 친구들을 만나 반가운 재회의 시간을 갖고, 식당 일도 구하며 밝은 미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몸을 너무 혹사했던 탓일까요? 식당 일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빈혈 기운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그녀는 조금만 무리를 해도 기절하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진 최은옥 씨는 병원에서 눈을 떴습니다. 병원에서는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해 몸이 많이 약해졌다며 일을 그만두고 몸이 회복되길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미용 공부는 최은옥 씨에게는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처음 공부할 때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온종일 공부를 하고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공부를 해도 하루에 2장 정도 읽는 게 다였다고 합니다.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녀는 북한에서의 힘든 생활들을 떠올리며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다시 책을 펼쳤습니다.
마침내, 미용시험에 합격한 최은옥 씨는 계속해서 자격증을 따냈습니다. 두피관리, 경락, 발 미용 관리사 자격시험까지 합격하게 되자 최은옥 씨는 두렵기만 했던 한국생활에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그러나 최은옥 씨의 이러한 노력은 또 다른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2012년 8월, 그녀는 병원으로부터 호르몬 분비 신경 장애를 판정 받기에 이릅니다.
무엇이든 배워야 하고, 일해서 얼른 돈을 벌어야 한다는 집념은 최은옥 씨의 삶을 숨 가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최은옥 씨에게는 오랜 시간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굳은 의지에 결국 병원에서도 최은옥 씨에게 될 수 있으면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는 일을 권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봉제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던 최은옥 씨는 재봉틀을 집에 들여놓고 주문을 받아 자택근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적은 수량밖에 하지 못했지만, 꼼꼼한 솜씨 덕분에 조금씩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최은옥 씨의 실력을 인정한 거래처 사장님은 다양한 원재료 공장의 사장님들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여러 회사를 방문하고 사장님들을 만나며 친목을 쌓게 된 최은옥 씨는 제법 많은 일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감이 늘어날수록 문제가 생겼습니다.
2주에 한번 동대문에서 80kg이 넘는 원단을 들고 집에 와야 했는데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이나 옮겨 탄 후에 간신히 집에 도착하고 나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체력이 소진되어 그날 일은 손도 대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몸이 아파 종일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몸이 지치고 힘들다 내버려둘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최은옥 씨는 조금이라도 몸이 회복되면 낮이며 밤이며 재봉틀을 돌리는 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최은옥 씨가 이렇게 강인하고 억척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착하고 믿음직한 딸, 경희가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왔을 때 8살이었던 경희는 바깥일로 바쁜 엄마 대신에 집안청소와 빨래는 물론 음식까지 장만하며 모든 가사를 책임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17살 고등학생이 된 경희는 집안일 뿐 아니라 엄마의 일까지도 덜어드리고 싶답니다. 언제나 자신을 위해 살아온 엄마에게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경희, 그런 경희에게 요즘 작은 소망이 생겼다고 합니다. 엄마와 함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한껏 웃으며 모래사장 위를 달려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 딸의 바람을 들은 최은옥 씨는 지금 당장 이뤄줄 순 없지만, 재봉틀에 소원을 담아 열심히 돌릴 테니 조만간 푸른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합니다.
최은옥 씨도 기프트카 주인공이 되면서 큰 소망이 생겼다는데요. 북한이탈주민들에게 재봉 기술을 가르쳐 주고, 한국 사람들과 만남의 장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겪었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합니다.
기프트카라는 큰 선물을 받았으니 경희의 소원을 들어줄 날도, 자신의 소원을 이룰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최은옥 씨는 다시금 의지를 단단히 굳혀봅니다. 최은옥 씨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러분도 힘껏 응원해주시길 바랍니다.
후기보기 ☞ http://gift-car.kr/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