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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손석호 씨]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나 세상을 향해 기지개를 켜다.

2014-03-03 뷰카운트4989 공유카운트0





대구 쌀집 늦둥이. 손석호 씨는 축복과도 같은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부친의 연세는 이미 쉰을 앞두고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 두 명이 더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운영하는 쌀 가게가 잘 되어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듯, 손석호 씨의 가정 역시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쌀집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복막염으로 수술을 받은 후 예전만큼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셨습니다. 결국 힘이 많이 필요한 쌀집 문을 닫고, 학교 앞에 작은 분식점을 내서 어머니가 생계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분식점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다섯 식구가 생계를 유지하기엔 많이 벅찼습니다. 장남이자 늦둥이라는 축복은 그때부터 오히려 손석호 씨에게 부담이 되기 시작했고, 가장의 역할도 함께 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손석호 씨가 스물셋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손석호 씨는 두 동생을 돌보며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환경을 탓하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받아들이고 이곳 섬유 공장에서 최대한 살길을 모색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허드렛일부터 시작한 손석호 씨는 덕분에 20여 년간 섬유 공장에 몸담으면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입지를 다져나갔습니다. 섬유공장은 그에게 마치 내 집과도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손석호 씨는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손석호 씨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아내 신명순 씨를 눈여겨보다 고운 심성에 마음이 끌려 수줍은 고백을 전했고, 신명순 씨는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기로 소문난 손석호 씨의 마음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일하며 사랑을 키웠습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은 금세 확인할 수 있었지만 빨리 결혼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두 사람 모두 동생들을 부양해야 하는 입장 때문이었습니다. 신명순 씨도 5남매 중 둘째였기 때문에 최대한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자립을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도, 긴 세월도 두 사람의 사랑을 갈라놓지는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5년이 되던 해, 드디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부모님의 도움이나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고 동생들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결혼자금도 전혀 모으지 못했지만, 사택에서 살 수 있도록 회사에서 배려해 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신혼살림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기다려온 만큼 결혼생활은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금쪽같은 두 아들이 태어났고, 두 사람이 함께 직장에 다니며 돈을 모으기 시작하자, 살림살이는 빠른 속도로 나아졌습니다. 네 살 터울의 두 아들은 손석호 씨의 어머니께서 돌봐주셨습니다.
그렇게 앞만 보며 달려가던 손석호 씨 부부에게 10년 만에 첫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바로 IMF였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회사가 그랬듯, 손석호 씨가 다니던 회사도 IMF 이후로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2000년에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당시 손석호 씨는 자신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바쳐 일해온 공장에서 사원, 반장, 주임, 계장, 차장을 거쳐 공장의 총 책임자인 공장장의 자리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시련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장을 살려보겠다는 생각으로 뛰어다녔을 뿐, 회사가 문을 닫게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공장 폐업신고를 하던 날, 갈 곳을 잃은 손석호 씨는 공장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습니다. 직급은 이미 높은 데까지 올라갔고, 나이도 적지 않아 고용해줄 회사가 없었습니다. 다른 일을 시작해볼까 고민도 했었지만, 그 역시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오랫동안 해온 일을 가장 잘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손석호 씨는 1년여의 준비 끝에 그간 모은 종잣돈으로 섬유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성공의 빛은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잠시 반짝이다 이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곤 곧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이 시작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어음부도로 인해 빚은 급속도로 늘어났고 곧 압류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 회사는 결국 많은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손석호 씨는 그렇게 야심 차게 시작한 일이 실패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려고 1년 넘게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는 물론, 집과 세간살이마저 모두 잃은 손석호 씨 가족은 월세 10만 원짜리 단칸방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80㎏이었던 손석호 씨의 체중은 120㎏까지 불어났고, 아무것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었지만, 나이는 물론 체중까지 많다 보니 취직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자녀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당혹감 역시 손석호 씨 못지않았습니다.



첫째 성헌 군은 한창 예민한 사춘기였던 중학교 때, 집이 어려워지는 과정을 모두 보고 겪었는데요. 성헌 군은 공대에 진학한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스스로 등록금을 벌어 공부했고, 지금은 취업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둘째 성진 군은 자신이 어려운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에 열심히 책을 보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장학금을 지급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받은 장학금으로 휴대용 멀티미디어 재생기를 마련한 성진 군은 다른 친구들이 학원에 갈 때, 기기에 내려받은 동영상을 보며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서울의 명문대에 입학해 부모님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늠름한 군인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답니다.



반면 손석호 씨는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들들이 너무나 안쓰러웠습니다. 비록 표현에 인색하고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지만, 의젓하고 속 깊은 아들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 더는 자녀들에게 짐이 되는 아버지가 아닌, 짐을 덜어주는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의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나이를 먹어버린 손석호 씨에게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의지와 현실의 벽 사이에서 큰 괴리를 느끼고 있을 때쯤, 첫째 아들 성헌 군이 일러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프트카였습니다.




손성헌 군은 인터넷을 통해 기프트카를 알게 되었고, 취직에 어려움을 겪는 아버지가 기프트카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어 아버지에게 신청해 보자고 했습니다. 아들의 제안을 들은 손석호 씨는 자신이 오래 몸담았던 업종과 관련이 있는 침구 수예점을 해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관련 거래처들도 알고 있었기에 차량만 있다면 문제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신청서를 써 내려가면서 손석호 씨는 처음으로 심연으로부터 새로운 희망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곧 기프트카를 받게 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삶의 의욕이 생기자, 손석호 씨는 우선 체중 관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의 삶을 일으켜준 두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깊은 절망에 빠져있는 동안 묵묵히 곁을 지키며 두 아들을 키워준 아내에게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도움으로 다시 세상을 향해 기지개를 켠 손석호 씨에게 여러분도 많은 응원을 보내주세요.


후기보기 ☞ http://gift-car.kr/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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