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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4

[이한수 씨] 인생에 영원한 오르막도 없듯 영원한 내리막도 없다.

2014-02-03 뷰카운트4909 공유카운트7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이한수 씨는 4형제 중 막내로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습니다. 바닷일 나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배를 몰래 타보기도 하고, 형들과는 낚시를 하며 해변에서 조개를 잡았던 행복한 기억만이 남아있는 시절이었습니다. 또한, 공부도 무척 잘해서 성적이 좋은 것은 물론 문학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 상도 많이 탔습니다.



타고난 머리도 좋았지만, 워낙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이한수 씨는 어렵지 않게 서울의 유명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적성과 맞지 않는 학과로 진학한 탓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1년 반 만에 자퇴를 하고, 다시 학력고사를 본 후 의상학도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의상학과는 남자들이 거의 눈길도 주지 않던 과였기에,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한수 씨는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멋 내기를 즐기고 옷을 좋아하는 자신의 적성과도 잘 맞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남들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소신을 믿고 그대로 밀고 나갔던 그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4년 내내 정말 재미있게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교수님의 소개로 곧바로 한 의상실에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의류 생산부터 영업, 고객맞춤 배달까지 차근차근 일을 배워가던 이한수 씨는 우연히 신문에서 일본 한 언론사의 장학생 모집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숙식 제공까지 해준다는 모집 광고 속 문구는 매력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망설여지는 것도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나게 된 지금의 아내 조금옥 씨와 잠시 떨어져 지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가면 얼마나 공부를 하게 될지, 또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이한수 씨는 기다려달라는 말을 선뜻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옥 씨는 고민하는 이한수 씨에게 한결같은 사랑으로 믿음을 주었고, 이한수 씨는 과감히 한국 생활을 정리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패션 전문 스쿨에서 2년간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 그리움도, 사랑도 깊어만 갔던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조금옥 씨는 결혼 후 무작정남편을 따라 낯선 일본땅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좁고 낡은 집을 얻어 생활하게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유학생활을 2년 더 한 뒤, 한국에 돌아온 이한수 씨는 유명한 의류회사에 입사했고, 사랑스러운 두 자녀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5년간 성실히 직장생활을 해오던 이한수 씨는 오랜 기간 구상해오던 창업을 하기 위해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지만 오랜 경력과 경험, 성실함은 머지않아 빛을 보았고 사업도 탄탄대로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이한수 씨는 잘 나가는 CEO가 되어 중국으로까지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물건을 중국에서 생산하다 보니 중국에서 머무는 일이 잦아졌고, 아내와 두 아이를 한국에 두고 떨어져 지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이한수 씨는 아내와 아이들의 거처를 중국으로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 첫째 호진이와 둘째 유림이의 나이가 각각 여덟 살과 다섯 살이었습니다. 다행히 낯선 환경과 문화에 잘 적응해주는 아이들 덕분에 이한수 씨는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는 그렇게 성공 가도를 향해 쉼 없이 달렸고, 이한수 씨 가족의 행복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았습니다.



열심히 달려간 정상 끝에는 뜻밖의 내리막이 이한수 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거래처도, 환경도 많이 달라졌지만, 이한수 씨가 외부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자 회사가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자 거래처들로부터 물품 대금을 받지 못하면서 회사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한수 씨는 중국에 가족을 두고 혼자 한국에 들어와 회사를 살려보려고 1년 동안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엄청난 빚을 남긴 채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거침없이 달려온 이한수 씨의 인생에 급제동이 걸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집과 돈, 명예를 한 순간에 모두 잃어버린 이한수 씨는 자포자기하는 대신 가족들을 위해 일거리를 찾아 다녔습니다. 하지만, 이한수 씨가 올라갔던 CEO라는 높은 자리와 오랫동안 했던 공부는 오히려 덫이 되었습니다. 중소기업들은 이한수 씨의 학력과 경력을 부담스러워 했고, 대기업은 이미 중년이 된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던 탓에, 중국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차마 한국으로 불러오지도 못하고, 온전히 혼자 떠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마땅한 거처도 없이 친구 집을 전전했고, 단기 아르바이트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중국에서 기약 없는 회복의 순간을 기다리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한수 씨 부부는 그렇게 각자 다른 곳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재작년 무렵, 아내 조금옥 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8년 만에 한국으로 들어오며 이한수 씨 가족은 함께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겨우 마련한 작은 월세 집에서 여전히 힘든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이한수 씨는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워낙 오래 중국에서 살다 보니 첫째 호진이는 한국에 다시 돌아온 후 문화적 차이 때문에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특유의 사교성과 친화력으로 빠르게 극복해 나갔습니다. 둘째 유림이도 긍정적이고 쾌활한 성격 덕에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습니다.
한참 예민한 나이의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던 이한수 씨는 한국 생활에도 잘 적응해 나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더욱 힘을 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던 이한수 씨는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봤을 때 의류업으로는 더 이상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른 일을 찾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평생 의류업에 종사해온 그가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좋아하는 것 중에서 찾아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일본 유학시절 4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애정을 쏟았던 '우동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워낙 면 요리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어릴 적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일본 우동집에서의 아르바이트 생활도 전혀 고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창업 아이템을 결정한 그는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일식 요리과정을 이수하고, 맛있다고 소문난 우동집에서 일을 배우며 창업 준비를 착실히 이행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매일같이 다시 일어설 날을 꿈꾸며 우동집 아르바이트와 일어통역 일을 하던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지역자활센터에서 기프트카를 소개해준 것이었습니다. 창업을 누구보다 간절히 꿈꾸고 있었지만, 스낵카 한대를 마련할 창업 자금이 없었던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신청서를 작성했고 결국 기프트카 주인공에 선정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기프트카 주인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한수 씨는 사업 실패 후, 칠흑 같은 어둠의 터널 속에서 헤매던 인생에 희망이라는 빛이 비쳐오는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실패를 디딤돌 삼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이한수 씨의 앞날이 항상 행복할 수 있도록 기프트카가 응원하겠습니다!


후기보기 ☞ http://gift-car.kr/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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